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다. 플루티스트 윤수연 씨(47)에게도 코로나는 재앙이었다. 세계 최초 ‘피겨 플루티스트’라는 타이틀로 액셀러레이터를 밟던 그에게 코로나가 급브레이크를 걸었다. 코로나가 그의 무대를 앗아간 것이다.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코로나로 힘들어 하는 국민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부는 아티스트로 다시 신발 끈을 고쳐 멨다. 전주한옥마을, 중앙시장, 남부시장, 모래내시장, 전주역 앞 마중길, 전북대 앞, 고속터미널 주변 등 전주시내 주요 골목을 무대삼아 희망을 연주하고 있다.

“여러분 힘내세요. 희망을 가지세요. 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
윤 씨가 코로나 이후 1년 넘게 진행하고 있는 길거리 연주는 혼자서 펼치는 ‘희망 캠페인’이다. 마스크를 쓴 채 플루트를 입에 물고, 인라인 스케이팅을 타면서 연주하는 모습만으로도 시선을 끌었다. 그냥 연주를 하면 이상하게 볼 것 같아 어깨띠도 둘렀다. 지금은 그를 알아보고 ‘엄지척’을 해 주는 사람도 많단다.
- 어떻게 길거리 연주에 나서게 됐나.
“코로나 직전 피겨 플루티스트로 데뷔했다. 방송 출연 등 언론 조명을 막 받을 시점에 코로나가 터져 링크장이 문을 닫았다. 얼음 위 연주가 어렵게 되면서 인라인을 배워 밖으로 나오게 됐다.”
(‘피겨 플루티스트’는 윤 씨에게만 따라다니는 호칭이다. 피겨를 타면서 플루트를 부는 연주자가 윤 씨뿐이기 때문이다. 소치 동계올림픽 당시 김연아 선수의 환상적인 피겨를 보고 얼음 위에서 플루트를 불면 어떨까 생각했단다. 나보다 피겨를 잘하고 플루트를 잘 부는 사람은 많겠지만, 피겨를 하면서 플루트를 부는 사람은 없을 것이란 생각에서다. 바로 다음날 전주 화산체육관 빙상장을 찾았다. 그의 나이 40세였다. 스케이트 한 번 신어본 적이 없었지만, 끈질긴 노력으로 2016년부터 3차례 문체부장관기 전국생활체육빙상경기대회에 출전해 금·은·동 메달을 목에 걸며 기량을 인정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2019년 겨울 서울 그랜드하얏트호텔 아이스링크장에서 정식 데뷔 무대를 가졌다.)
- 코로나로 본인 무대도 없어 힘들 텐데, 이웃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려면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다.
“희망캠페인을 시작한 건 코로나 훨씬 전인 2013년부터 해온 일이었다. 내 스스로 자살까지 시도할 만큼 극심한 우울증을 털고 일어섰기에 희망과 긍정 마인드가 얼마나 중요한 지 누구보다 잘 안다. 2010년도 음악잡지의 표지모델이 될 만큼 잘 나갔으나 멘토처럼 따랐던 사람에 대한 인간적 배신감으로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이를 추스르는 데 2년이 걸렸다. 우울증을 겪다보니 어려운 이웃이 보이더라. 또 음악만이 배신하지 않는다는 걸 새삼 실감하는 계기였다. 그 전까지는 음악으로 행복을 전한다고 생각했는데, 캠페인을 통해 스스로 위로가 된다.”
- 연주에 어려움은 없는지.
“마스크를 쓰고 굴러다니면서 플루트를 부는 사람은 아마 세계에서 유일할 것이다. 마스크를 쓰고 악기를 부는 게 쉽지 않다. 침으로 젖어 숨쉬기 어렵고 귀가 아파 마스크를 새로 고안해서 착용하고 있다.”
- 보람도 클 것 같다.
“대공연장의 큰 무대도 많이 서봤다. 그보다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 할머니 팬도 생기고 음료수를 건네주는 버스기사도 있었다. 플루트 연주를 듣고 노숙하던 분이 눈물을 흘리며 위로를 받았다는 말도 들었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캐럴 한 번 제대로 못 들었는데 캐럴 연주에 즐거워하던 분들의 모습도 눈에 선하다.”
- 강사로도 활동하며 희망을 전하고 있다. 이런 열정의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나.
“여러 직함이 있는데, 하나를 고르라면 ‘긍정을 전하는 아티스트’로 불리우고 싶다. 내 에너지가 바로 긍정 마인드에서 나온다고 보기 때문이다. 희망의 불씨만 있다면 얼마든지 희망의 불을 지필 수 있다는 걸 내 경험이 말해준다. 강연에서 곧잘 ‘불난 집 딸’이라고 나를 소개한다. 실제 불난 집 잿더미에서 플루트를 연주했다. 잿더미에서 희망을 분 연주자의 말이 가볍지 않을 터다.”
(윤 씨는 부친인 윤명호 화백과 함께 완주 상관에 예술 힐링센터를 계획했다. 그림으로, 음악으로 행복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담은 공간이었다. 그런 힐링센터가 완공을 앞두고 2016년 화재로 전소됐다. 화업 60년 개인전을 앞둔 윤 화백의 작품도 모두 불에 탔다. 당시 상황은 KBS 인간극장 5부작으로 방영됐다. 윤 화백은 붓을 꺾지 않고 현재 금암동 전자상가 화실에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 ‘긍정 아이콘’이 되기까지 부친의 영향이 컸다고 들었다.
“보통 음악을 하는 사람은 여유 있는 집으로 여기지만 그렇지 못했다. 어려서가 아닌, 고교 진학 후 뒤늦게 플루트에 입문했다. 그럼에도 한국화에 대단한 열정을 가지신 아버지를 보면서 많이 배웠다. 붓을 잡을 때 아버지 눈빛이 달라지신다. 한 음을 불더라도 마음을 다하라며 자신감을 심어줬다. 아버지의 창의성이 내가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 있었던 힘이지 않았나 싶다.”
(팔순의 윤 화백은 귀가 잘 안 들리지만 눈이 보이는 게 감사하다고 여긴단다. 눈이 보여 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까. 세상일에 귀를 닫고 지금도 밤새도록 그림을 그린다. 작업 중 쓰러지면 살리려 하지 말고 붓 한 자루만 쥐어달라고 했단다. 윤 씨는 불 탄 아버지 작업실에서 유일하게 남은 불에 그슬린 붓 한 자루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코로나 진정되면 전 세계 링크장을 찍고 싶다. ‘여니(Yeony)’라는 영문 이름을 만들었다. 영어 울렁증이 있는 데 몇 마디씩 영어를 공부하는 이유다. 누구나 마음속에 긍정과 부정 스위치 있다. 어떤 스위치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생 바뀐다. 힘들었을 때 최악을 봤다. 정말 희망이 없었다. 연습과 노력으로 여기까지 왔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누구를 따라하지 않고, 유니크한 길을 도전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도 이를 알기 때문이다. 노력하면 이뤄진다는 걸 꼭 보여주고 싶다.”
(윤 씨는 단 1명이라도 저런 에너지 넘치는 플루티스트가 있구나, 그걸 보고 용기를 얻는다면 만족하단다.)
- 코로나에 힘든 도민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 한마디.
“코로나로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탓만 할 수 없지 않나. 마음이 죽어가는 게 안타깝다. 이 위기를 어찌 넘을 것이냐 생각해야 한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면 못 할 게 없다. 서로 격려와 응원이 필요하다. 코로나로 인해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나를 돌아볼 기회가 됐다. 코로나 안에서도 노력 여하에 따라 길이 나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 윤수연 씨는
피겨플루티스트 윤수연 씨의 본업은 플루트 지도자다. 전주 서곡에 있는 플루트 교실에서 16년째 플루트를 가르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지도한 제자들의 모습을 철사로 만들어 교실에 놓아두고 있었다. 언젠가 제자들을 모아 연주회를 이어가겠다는 꿈을 담아서다.
윤 씨는 한 때 잘나가는 연주자이기도 했다. 독주회와 오케스트라 협연도 많이 했다. ‘해피 투게더’ 앙상블을 만들어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무대에도 올렸다. 그런 활동으로 음악잡지 표지모델이 됐다.
전북도립어린이오케스트라 플롯지도교사 10년과, 방송사에서 진행하는 임신육아교실 프로그램에서 7년 동안 연주한 경력도 있다.
그의 플루트 교실에서 또 눈길을 끄는 게 각종 메달과 표창장이다. 군부대에서 준 메달과 감사패가 50여개에 이른다. 군부대 강연과 연주가 장병들에게 기를 넣어주면서 그를 찾는 곳이 그만큼 많았다는 이야기다.
그의 열정은 마르지 않는 샘물 같다는 평을 받는다. 겁없이 평창올림픽 현장을 찾아 연주하고, 지난해에는 광화문에서 연주하다 진보·보수 양쪽의 오해를 사는 해프닝도 있었다. 한 번 죽었다 산 사람, 잿더미를 딛고 연주한 사람에게 겁날 게 없단다.
그는 자신을 토끼과가 아닌 거북이과라고 했다. 함께 출발했을 때 처음 뒤쳐졌지만 어느새 옆에 사람이 없는 경우 많았다. 대부분 중도에 그만둔 때문이다. 그는 지금도 좋지만 50, 60세가 기다려진다고 했다. 끈기와 인내, 희망과 긍정의 아이콘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